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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신앙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행복하게! 아름답게! 충만하게! 웃으며! 열정적으로! 날마다 창조적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을 위하여 성취를 위하여 열심히 뛰기도 합니다! 신앙인도 때론 힘들고 때론 속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란! 그 모든 순간에 내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인印, 그 자의식自意識, 나는 그 분이 던져주신 생의 의미를 찾아 풀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요, 영원을 향해 떠난 순례자요, 진리의 별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필그림Pilgrim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자기의식이 있기에 구별되고 그래서 다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
    첨부파일 3개
    4월 2일(화) 갈라디아서 1:11-24 
    바울의 자기 변호-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사로 잡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갈라디아는 에베소나 고린도나 빌립보처럼 한 나라나 도시 지명이 아니라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처럼 또는 남한지역, 북한지역, 영남, 호남지역같은 총체적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이 갈라디아 지역의 남부인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 복음을 전했고 그 후 이들의 신앙을 변질시켜가는 사람들이 있고 영향받는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를 쓴 것은 남부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의 교회들이 회람하여 이 편지를 읽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쓴 장소는 고린도, 에베소에서 썼다는 견해들인데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만큼 바울의 색채가 아주 강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은 짧은 자서전적 신앙고백을 싣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 많은 말을 들었던 바울은 내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분명히 고백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갈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갈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바울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신앙적 신학적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바울에게 구원의 비밀을 직접 계시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지금도 신학계에서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신학적 방향이 서로 다르다고 보면서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사도 바울은 당당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 복음서에 나타난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분명히 정립한 과정은 바로 예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주목해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역정을 설명합니다
    [갈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갈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동갑나기 친구들 중에서 자신이 믿음으로 일등이었다고 말합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정과 율법에 대한 열정이 친구들 중에서 가장 앞섰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사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열정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에 위배된다고 믿어서 극단적으로 박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정하심을 따라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택정하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사도바울은 평생 자기가 이렇게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될 줄은 몰랐고 그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세 전에 자신을 택하셨고 또 은혜로 자신을 부르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부르셨습니까?
    그는 그 목적을 또한 생각합니다. 
    [갈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부르심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구원자 예수님을 품고 바울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었고 뜻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이후의 과정은 연대기별로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간략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성벽을 넘어 탈출하기도 했고 또 예루살렘에서도 오해를 받는 일 등이 있어서 고향 다소로 피신하여 내려갔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기간이 놀랍게 긴 기간이었습니다.
    [갈1:16]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이 부분은 조금 주목할만한 부분입니다. 
    아라비아는 어디일까요? 또 얼마나 머물러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아라비아라는 지역은 어느 지역으로 특정하기 어려운, 대단히 광범위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바울은 시내산을 아라비아에 있다고 말합니다. 아라비아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에서 두번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바울이 시내산으로 가서, 또는 그 부근에서 사막과 광야 수도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영성을 재 확인하고 신앙을 점검하고 신학을 세워갔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4: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그렇다면 그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 후 삼년만에'라는 단어로 추측할 때 3년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정도 있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일생을 보면 꽤 긴 시간의 숨겨진 영성수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박해하는 가운데 그후 길리기아 다소로 갔다고 말하고있는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 바나바가 터어키에 있는 다소까지 바울을 찾아가 시리아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올 때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공식기록에 없는 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세월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런데 거의 10년이 넘는 세월을 자기 수련에 바쳤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가 신약성경의 14권을 쓴 것은 결코 가볍게 나온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따라 그의 신학이 정리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아마도 당시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성경에 나타는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예수님보다 1-2살 밑의 나이 정도로 추측되고 베드로와 바울은 비슷한 당시 30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30대 중반에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그리고 40대 중반에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하고 또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침묵의 세월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때로는 이 고요함 속의 깊은 영적 수련이 필요함을 생각합니다.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갈라디아서를 읽습니다. 

    [갈1:18] 그 후 삼 년 만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의 경험을 한 후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갈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 [갈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을 떠나 터키 지방으로 감- (사도행전 9장)  [갈1: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갈1: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갈1: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지금 위의 내용에는 십 몇년간의 모든 내용들이 다 요약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사생애 30년이 숨겨진 것처럼 사도바울도 이 숨겨진 10여년의 기간 동안 엄청난 자기 수련을 했고 깊은 기도를 했고 자기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그 신학의 핵심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그가 전한 '오직 예수'의 복음을 잊어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경향에 대해 또 그렇게 가르치는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 지도자들에는 명백한 이단도 있었지만 율법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이 쉽게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는 당시 소위 교계 지도자들이 대한 맹목적 숭배에 있다고도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늘 다른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하고 아볼로를 비교하고 다른 교역자들과 비교한 것을 늘 입에 올리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것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을 살까 고민해야하는데 늘 하는 일이 베드로, 바울, 아볼로를 비교하고 뒷말만 하는 경향에 마음이 무거웠고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사실은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도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늘 교회 파벌만들기와 다른 교인들 비판만 하고 남의 말만 하고, 사람들 일만 속닥거리고 관심가지고 뒷얘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 말씀대로 살겠느냐하는 울분이 갈라디아서에 수없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관심이 딴데로만 가있어서야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희생하고 언제 섬기고 나누겠느냐하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진실하고 은혜로운 말은 없고 늘 인간적인 말만 하느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수없이 묻습니다. 너희가 어리석지 않으냐! 
    [갈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3:3]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목회자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목회자만 따라다니고 인간적인 생각과 관심만 가지다가 신앙의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습니다. 늘 다른 교인들만 바라보면서 생각이 저급한 호기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님 기뻐하시지 않는 일입니다.
    남의 일에 관심가지는 것만큼 재밌는 일을 없지만! 극복해야합니다.
    잠언을 생각합니다. 
    [잠18:8]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26:22]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오죽하면 두번이나 똑같은 구절을 써놓았을까요?
    우리의 관심이 저급하지 않고 천박하지 않기 원합니다! 남의 말이 그렇게 재밌어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바울만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택하셨습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사랑하시기에 택하셨고 구원하시려고 택하셨고 함께 동행하시고자 택하셨고 사명을 주시고자 택하셨습니다!
    [갈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 원합니다. 

    오! 주님!
    우리를 도우셔서 택정하심과 은혜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고 내 언어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아멘!

     

     

     
    • 이준원2019.04.02 10:19


      그래서!
      오늘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바울만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택하셨습니다!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사랑하시기에 택하셨고 구원하시려고 택하셨고
      함께 동행하시고자 택하셨고
      사명을 주시고자 택하셨습니다!

      [갈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 원합니다.

      오! 주님!

      우리를 도우셔서 택정하심과 은혜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고
      내 언어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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