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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신앙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행복하게! 아름답게! 충만하게! 웃으며! 열정적으로! 날마다 창조적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을 위하여 성취를 위하여 열심히 뛰기도 합니다! 신앙인도 때론 힘들고 때론 속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란! 그 모든 순간에 내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인印, 그 자의식自意識, 나는 그 분이 던져주신 생의 의미를 찾아 풀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요, 영원을 향해 떠난 순례자요, 진리의 별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필그림Pilgrim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자기의식이 있기에 구별되고 그래서 다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가이사의 것, 그리고 산 자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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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5일(화) 설날 아침 / 마가복음 12:14-27

    세금을 내는 문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얼마나 친분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합력합니다. 그리고 교묘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걸고 넘어지게 하려는 불순한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정부가 부과한 무거운 세금 때문에 유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던 시대였고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 중에서 세리가 된 사람은 매국노나 창녀로 취급당하던 때였습니다. 사실 창녀와 세리는 그 신분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지만 세금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착취하는 세리들을 창녀보다 못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세금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두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야한다고 말한다면 고난당하는 백성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백성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어 인기가 떨어지고 백성들이 예수님을 외면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하면 당연히 정부에 의해 걸려들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함정적 의도가 보이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外飾- 이중적 의도를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게 한 후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 데나리온에 부조된 가이사 황제의 얼굴과 글을 보면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그들이  정말 가이사를 거부하는 전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 동전에 가이사의 얼굴이 있긴하지만 그 동전-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대답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그 돈을 사용하여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 있다면, 그 돈으로 경제생활을 하는 현실을 누리고 있다면 거기에 합당하게 그 질서- 세금 내는 것을 포함해서-를 따라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너희들은 그런 질서를 거부하지 않고 이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반문이셨습니다.

    [막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막12: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막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막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그러나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것'에 대한 인식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은 성전세를 언급한 것이기도 하지만 황제를 신성시하는 데 대한 분명한 거부 선언입니다. 황제가 신적인 영예와 숭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가이사도 그 바리새인들도 헤롯당도 모든 세상 것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이사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현실적 통용질서일 뿐입니다. 그러니 동전을, 그 권력을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이사에게! 그 현실을 따르는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것은, 가이사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진정 가르치고 싶으셨던 말씀이라고 여깁니다!

    가이사 뿐 아닙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는다! 아름답고 새로운 질서가 있다!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천국이 있다면 어떻게 살게될 것인가를 비유하면서 묻습니다.

    사실 이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나타난 신앙종파는 아니고 말라기와 신약 사이에 생겨났던 지도층 계열로 보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나타난 사독 제사장의 후손 계열이었는데도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계파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다른 성경은 인정하지 않고 모세 오경만을 인정했는데 내세를 부정하는 무신론으로서 어떻게 종교인이 될 수가 있는가하는 의문을 남깁니다만 그렇게 많은 자료가 없어 사두개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연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시대정치적 상황 속에서 높은 관직에 올랐던 소위 지성적 율법주의자들, 현실적 율법주의자들로 여겨집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 시대 때에서 종교인은 아니지만 유교의 주자학과 성리학 등에 목숨을 걸고 그 윤리규범으로 나름대로 나라를 이끌어갔던 유학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들도 내세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사회규범을 이끄는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부활에 대해 냉소적으로 질문합니다.

    즉 당시 형수취사의 규례, 게대결혼이라고도 하는 법칙-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취하여 생활보장을 해주고 그 자녀들에게는 형의 이름으로 유산까지 주어야하는 법이었습니다. 성적인 타락이 초점이 아니라 과부와 고아들을 지켜내고자하는 인권법에 가까웠기 때문에 거부하는 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형제들이 다 죽어 그 형제들의 아내가 되었던 한 여인이 천국에 가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즉 내세라는 것은 없다는 이론에 선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는 결혼이나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막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막12: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막12: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막12: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막12: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막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막12: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막12: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막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에 대한 전적 신뢰였습니다.

    나비 애벌레에게 네가 죽으면 다시 나비로 태어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게 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날개는 무엇이며 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존 상식, 2차원 3차원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놀라운 세계, 영靈차원의 세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것을 믿는 것 뿐입니다!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새질서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 하늘나라에서 서로 알아보게 될 것인데 어떻게 알아보며 어떤 얼굴일지, 그곳에서는 무엇을 영원히 하게되는 것인지,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는 은총의 세계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살아있는 동안 산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말씀하면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적으로는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계속적으로 현재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이 땅의 우리의 삶입니다.
    살아도 죽은 자가 있고 죽어도 산 자가 있습니다.

    의욕이 죽고 꿈이 죽고 소망이 죽고 사랑이 죽어있으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있기 원합니다!

    오늘 살아있어 뭔가를 창조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살아있는 생애가 되기 원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산 자, 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


    • 이준원2019.02.06 11:29


      문제는 이 땅의 우리의 삶입니다.
      살아도 죽은 자가 있고 죽어도 산 자가 있습니다.

      의욕이 죽고 꿈이 죽고 소망이 죽고 사랑이 죽어있으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있기 원합니다!

      오늘 살아있어 뭔가를 창조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살아있는 생애가 되기 원합니다!

      산 자의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산 자, 산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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