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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칼럼
  

    신앙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행복하게! 아름답게! 충만하게! 웃으며! 열정적으로! 날마다 창조적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을 위하여 성취를 위하여 열심히 뛰기도 합니다! 신앙인도 때론 힘들고 때론 속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란! 그 모든 순간에 내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그 인印, 그 자의식自意識, 나는 그 분이 던져주신 생의 의미를 찾아 풀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요, 영원을 향해 떠난 순례자요, 진리의 별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필그림Pilgrim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자기의식이 있기에 구별되고 그래서 다릅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종말론] 죽으라고 하면 다 싫어하지만!
    첨부파일 5개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으라고 하면 다 싫어하지만!



    사도바울은 지금 죽음을 초월한 당당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심지어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 신앙인들도 막상 죽으라고 하면 화를 내고 싫어하지만!

    (^^ 그건 이 땅에서 살아야할 육신과 그 육신으로 이루어진 추억과 사연이 너무 깊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는 미경험의 세계이기에 신앙인이라고 해도 막연한 두려움도 있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생사관이 분명합니다! 즉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뜻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며 또 죽은 후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나라, 거룩한 몸이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음을 교인들에게도 분명히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장막집은 인간의 몸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의 몸을 흙으로, 손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영화체靈化體- 육신의 몸과는 다른 영화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또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몸이 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저 하늘에 거하게 될 우리의 새로운 몸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하늘의 집에 거할 수 있을만한 완벽한 몸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 영원한 몸을 입기를 원합니다. 탄식합니다.

    [고후5: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왜 탄식하는가요? 인간의 몸의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져도 인간의 몸의 한계 안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있고 피곤함과 고달픔이 있는 육신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영원한 몸을 입을 수 있을까요?

    그 아름다운 몸을 입으려면 일단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 거룩한 몸을 입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는 담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아직 우리는 이 장막집, 이 육신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자면 지금 이미 우리는 벌써 천국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믿고 그 사랑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기에 천국은 내 마음에서, 내 삶에서, 내 가정에서 이미 벌써!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미 벌써,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Already but not Yet! 이미 벌써! 그러나 아직 아닌!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살지만 흙으로부터 온 육신을 입고 살고 있기에 또 어두운 세력의 공격이 있기에 갖가지 사연들 속에서 통증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애통하고 슬퍼하는 사연을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도바울도 힘든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힘들고 아픕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인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탄식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그 거룩한 집- 새로운 몸- 새로운 삶을 그리워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지금 덧입고자 함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함"이라고 말합니다.

    [고후5: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의 종말론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벗는다'고 말하고 '입는다'고 말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된다'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지금 사도바울은 죽은 후의 삶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의 종말신학은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구약 랍비들의 전승과 이해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복잡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주 깁니다.

    부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종말론에 대한 요약 이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인정한 부활의 과정은 어떤 것일까요? 바리새인의 부활신앙을 해석한 랍비들의 전승 즉 그들의 구약적 종말 이해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잠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무덤 속에 있던 이들은 비록 옛 몸은 썩었다할지라도 다시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시는 새 몸을 입고 부활합니다. 그 때까지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의식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랍비들이 생각하고 있던 종말론적 이해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경험하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조금 달라집니다.

    즉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천국이라면 십자가의 한 강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따라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잠을 자거나 무의식 속에 있는것이 아니요, 여전히 의식을 유지한 채로 즉시 천국으로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이해입니다.

    신학적 논쟁점이긴 합니다만 초대교회는 부활을 믿는 랍비들의 바리새적 부활 이해, 즉 사람이 죽으면 무의식의 잠을 자다가 나중 하나님의 날에 함께 깨어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설과 또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생성된 새로운 죽음 과정 이해, 즉 죽으면 잠을 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의식은 여전히 깨어있어 즉시 그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는 두가지 견해가 서로 섞여져 있는 것이 초대교회의 종말론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신약성경에서도 이 두가지 종말론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이 '잠을 자다가' 나중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이해, 그리고 죽으면 의식도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깨어 있어 즉시 그 영혼이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는 표현-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처럼 곧 천국을 누린다는 견해가 서로 달라보이는데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 본질인 '나라는 의식'은 죽은 후 잠을 자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의식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유이긴하지만 죽은 즉시 천국에 간 것으로 보이는 거지 나사로의 의식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의 종말론은 이 두가지 신학적 물줄기가 섞여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에 있어 사도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는 랍비들과 바리새파 신학 전통을 따라 죽음에 대하여 '잔다'는 표현이 계속 나타납니다. 훗날 깨어난다는 것으로 서술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죽은 후 즉시 그 영혼은 의식이 있는 채로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무의식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악한 자들을 포함한 종말심판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죽은 상태에서 벌거벗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몸을 잃어버렸는데 '의식'만 남은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의 '의식'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입니다. '의식'이 나'입니다. 그런데 그 내가 육신이라는 틀이 없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눈이라는 보는 기관과 귀라는 듣는 기관이 사라진 상태에서 의식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아마도 사도바울은 이 몸- 의식이 벌거벗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즉 사도바울도 죽은 즉시! '나'라는 자기 의식이 새 몸- 영화체를 입기를 원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벗은 몸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가려야할 것들이 다 드러나는 추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죽은 후에 옷을 벗기면 몸이 다 드러나듯이 영혼의 모든 적나라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지금도 그 용서의 옷을 입고 있기에 죄와 누추함의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옷으로 감춰져 있습니다.

    ( 저는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문장 문장을 주석해가면서 종말론을 오래동안 연구하고 자세히 논쟁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는데 결론을 의외로 아주 간단히 내렸습니다.

    지금의 요한계시록 논쟁은 개인종말과 우주-역사종말의 과정에서 계획하신 '여러 과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핵심입니다. 그 '과정'이 아주 복잡해보이기에 수많은 해석들이 나타났습니다. 

    즉 사람이 죽은 후 의식이 잠을 자는 것이냐 깨어있느냐, 종말심판의 과정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으며 부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의 논쟁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억지로 해석하는 이들은 그것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을 붙여 나만 보았다 들었다 알고있다고 해석하니 좀 곤란해집니다. 예언이 어려울때는 '복음의 빛'으로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죽어본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 직접 듣고 보았다고 하지만 신뢰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 모든 요한계시록의 해석을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기로 하니 아주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계획을 세우시고 언제든지 바꾸실 수도 있습니다. 순종할 뿐입니다. 우리의 미래도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주님의 뜻 아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꾸시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요한계시록을 들고 주님을 가르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에 주님의 뜻에 맡기면 됩니다. 왜 주님께서 죽은 후의 과정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놓았느냐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온전히 믿고 주님께 맡기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종말론 해석의 원칙입니다. 그 이상 다른 해석은 없습니다!)



    종말론은 현실론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오늘을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

    가본 사람이 없습니다. 경험해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성령께서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보증하십니다!

    [고후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담대합니다.

    [고후5: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 여기에서는 단락을 나누어야합니다.)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지금 우리는 성령께서 보증해주신 내세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을 모셨지만 그러나 완벽한 주님과의 거주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주와 따로 떨어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눈에 안보인다해서, 경험해보지 않았다해서 떨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믿음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서 일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요, 죽어도 주님과 함께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천국을 믿으면서도 죽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영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결론은 아주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지금 오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는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상급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니, 상급 자체가 목적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께서 수고했다 한마디 해주시면 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거룩한 자부심입니다!


    [고후5: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큰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모르는 일도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일!

    그 거룩한 실천이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몸으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 있습니다.

    내 몸, 시간, 재능, 물질 모든 것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사용하는 거룩한 믿음의 품격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샬롬입니다^^


     

     

     

    • 이준원2018.03.10 19:56


      오늘 본문 말씀은
      많은 신학적 논쟁점과
      또 깊은 신앙적 사유를 필요로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시간되는대로
      좀 더 다듬어서
      종말에 대한 이해와
      오늘의 신앙적 행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묵상을 첨가해볼까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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